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Hoony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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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에 대하여

걷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. 작은 동네 곳곳을 걸어다니는 일은 그 친구의 일상이자 취미였다. 퇴근 후에는 언제나 1시간은 족히 걷다 집에 돌아가고 했다. 한 때는 성북구에서 시작해 서울 시내를 가로질러 집으로 걸어 돌아온 적도 있더랬다. 그 친구는 작은 동네 곳곳의 삶을 함께 했다. “한 때 이곳에는 어떤 가게가 있었어.”, “얼마 전까지 이런 곳이었는데, 최근에 이런 곳이 되었어”, “다음 달이면 이 곳도 이제 마지막이래”. 그 친구의 삶은 작고 느리고 단단했다. 작고 느리’지만’이 아니고. 작고 느리고 단단했다.

나는 좋음만 남겨놓고, 그 좋음 사이에 이유를 뒤늦게 깨닫는다. 그렇게 남겨놓은 좋음과 좋음의 이유들은 언제나 작고 느렸다. 꽤 자주 고기를 먹지 않고, 간간히 단식을 하고, 종종 요가의 시간에 나의 단단함을 찾아보고, 때론 걷고 때론 뛰다가, 그렇게 찾은 나의 단단함을 글로 남겨보기도 하고, 대부분은 혼자의 시간을 보내다, 전부에서 대부분을 뺀 시간의 대부분을 나를 깊게 내어주는 몇몇과의 시간을 보낸다.

나는 크고 빠르게 태어났거나 어쩌면 크고 빠른 삶으로 태어났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랐다. 그런 내가 오늘 손에 쥔 돌멩이들 사이에서 내일이 되어 이건 보석이었네 라는 것들을 남겨놓고 나니 남은 것들은 작고 느렸다. 그렇게 무의식적인 욕구들 사이에서 의식적으로 버려야 할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. 그래서 찾기 시작했던 것 같다. 내가 가진 작은 그릇에서 어떤 것들을 버려내야, 오늘은 돌이지만 내일은 보석인 것들만 남아 더 단단하고 더 깊게 담아낼 지.

얼마 전 우연히, 정말 우연히 들른 교보문고에서 걷기를 좋아했던 그 친구의 책을 보았다. 같은 제목과 같은 구성과 같은 목적이 담긴 책이지만 내 이야기이거나 혹은 나와의 이야기가 담긴 그 친구가 들려줬던 초안과는 꽤나 달랐다. 펼친 책은 오롯이 그 친구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 친구의 이야기로 끝났다. 당연한 간사함에 따라온 서운함을 곱씹어보다 나는 어딘가에서 나를 찾고 그 친구는 또 어딘가에서 그 친구를 찾았나보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.

나는 작고 천천히 가는 단단한 삶을 산다. 깊게 사랑하면서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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ChangJoo Park(박창주)

개발 이야기는 아니지만 잘 읽었습니다